평화길라잡이 심양-단동-대련 평화여행

By |2011-12-20T07:02:23+00:0012월 20th, 2011|사무국과 탱고를|

지난 3월부터 평화여행계를 부었다. 일반적으로 여행을 할 때에 ‘어디를 가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가는가’라고 한다. 그래서 내게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최고의 여행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배울 게 많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평화쌤들과 함께 가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여행의 목적과 주제를 정해서 진행하는 ‘프로젝트형 여행’이라는 의미도 있다. 또 이번 여행은 개인적으로도 내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2011년, 숙제가 참 많았던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나를 격려해주고 싶었다.


  11월 25일부터 27일까지 2박3일의 여행은 중국의 심양-단동-대련을 방문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심양에서는 심양고궁과 화신소학교, 단동에서는 박작성과 압록강단교, 대련에서는 대련부두와 여순감옥, 성해광장을 찾았다. 이 가운데 특히 감명이 깊었던 방문지를 중심으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기록으로 남긴다.



 

1) 끊어진 압록강철교


  압록강은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 흐르는 국경을 이루는 강이다. 압록강에는 두 개의 철교가 있는데 하나는 1911년에, 다른 하나는 1943년에 지어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방문을 했을 때, 통과했던 철교가 바로 1943년에 지어진 철교다. 이 철교는 조중우의교라고 불린다. 그리고 1911년에 지어진 다리는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절반만 남았다. 중국에서는 이 끊어진 철교를 관광지로 개발해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압록강에서 보트를 타고 북녘 가까이 갔는데 북쪽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고, 손도 서로 흔들어 보였다.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땅에 발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가서는 절대 안 된다는 현실이,, 결코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으로는 화가 나고 답답했다.


 


  분단은 과거의 역사가 만들어 놓은 숙제다. 우리역사가 나아갈 방향이 분단이 아님은 명확하다. 현재의 역사는 분단의 역사를 통일의 역사로 바꿔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역사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역사를 되돌려 놓는 오명을 쓴 시대는 아닌가.


  김구 선생과 이승만 전대통령은 독립운동가였으나 해방이후 다른 길을 걸었다. 이승만은 남쪽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했고, 김구는 통일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김구는 분단을 막기 위해 북쪽 정치가들과도 협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승만은 상대할 수 없(또는 상대하기조차 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얼마 전 돌아가신 김준엽 전 고대총장님이 이런 말씀을 했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차이에서 김구 선생이 역사에 살았다면, 이승만 전대통령은 현실에 살았던 인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치적 지도자일수록 역사에 살아야 하는 책임이 있는 가운데, 현재 이 시대 정치인들은 어떤 쪽에 가까울까… 역사에서 살아갈 정치적 지도자가 이 시점에 더욱 절실하다.

 2) 아픈 역사가 낳은 ‘조선족’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재중동포. 중국은 소수민족을 가리켜 위구르족, 몽고족, 조선족 등으로 명명하는데 나도 무의식중에 중국정부에서 부르는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쓰곤 했다. 내게 있어 그들은 ‘소수자 조선족’이 아닌 재중동포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을 조선족이라 부르는 상황에서 내가 재중동포라고 부르는 게 무슨.. 언제부터 내가 그들에 관심을 갖고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 마냥.. 배려하는 척.. 가식같이 느껴진다. 이러한 부끄러움 때문에 재중동포라 말하는 게 여전히 조금은 낯설다.


  우리 방문지역에 <심양화신조선족소학교>가 포함되어 있어서 여행 전에 ‘조선족’을 키워드로 검색하면서 한겨레 기획기사들을 읽게 되었다. 일제시대에 농민들은 생활터전을 찾아 중국 만주땅을 밟았고, 독립운동가들은 항일투쟁을 위해 망명했다. 일제의 강제이주정책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도 많았다. 나라가 힘이 없어 국민들을 뿔뿔이 흩어져서 온전히 스스로 자신을 지키며 살아왔다. 해방이 되었어도 고국에 생활근거지가 없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이 조선족 1세대이고, 그들의 자녀들이 2세대이다.


 


  주로 중국동북지역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이 1세대고, 외국에 나가 하층노동을 담당한 사람들이 2세대라면, 최근에는 고학력에다 4개 국어에 능통한 최고의 엘리트들이 조선족 3세대에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공부 잘 하는 조선족청년들은 중국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에서 취업한다고 한다.(일본에서의 조선족 5만3천명 중 33%가 유학생, 그 중 27%가 현지취업, 최고 학력의 엘리트들이 일본체류 조선족의 주류를 이르는 반면 한국체류 조선족 대다수는 일용노동에 종사./ 한겨레, 2011.11.18)  한국사회에 만연한 조선족에 대한 차별과 무시, 심지어 괄시까지… 그들이 한국땅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제 한국사회는 그 다음을 고민할 때인 것 같다.



3) 청나라역사에서 비춰본 한국사회


  혜정쌤이 맡은 자료조사 내용은 청나라역사와 만주독립운동이었다. 준비해 오신 페이퍼를 읽으며 한 나라가 흥망성쇠하는 과정을 간략하게 그릴 수 있었다. 청나라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배경은, 여느 나라가 그랬듯, 권력자의 부패와 사치로 찌든 모습이다. 청나라 건륭제 말기에는 많은 해외정벌과 계속되는 황실의 사치로 인해 천문학적인 경비가 국가재정에 부담을 주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도 건륭제의 총신이었던 화신의 독선과 관리들의 부패로 인해 청나라 각지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점차 쇠퇴해갔고, 이후 1851년에 사회운동인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났는데 여기에서는 한족의 독립, 토지의 균등한 분배, 만민평등이 내세워졌다.  


 
청나라의 역사를 읽으면서 계속 겹쳐졌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말이다. 고위관료들의 비리와 부정부패문제, 토건사업에 어마어마하게 지출되는 세금, 극심해지는 빈부격차,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쌓이는 분노… 과연 이러한 문제들을 과연 지금의 한국사회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견고한가. 그래서일까. 한국사회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향한 갈망이 분출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인권’, ‘정의’와 같은 구호의 소리가 높아진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목소리에는 언제나 ‘모두가 사람답게’라는 존엄성의 지향이 전제되어 있다. 여기에는 권력을 가진 소수자들에 대한 적대감도 깔려있다. 불의가 만연한 사회구조가 평범한 사람들의 박탈감을 더 크게 키우고, 이러한 박탈감은 이기적인 권력집단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며, 결국 판을 갈아엎자는 변혁으로 나아가게 된다. 나는 청나라의 쇠퇴에서 한국사회의 오늘을 엿본다. 한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아니 정확히 말해, 한 나라의 지배권력이 무너지고 민중들의 힘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몰락이 아닌 더 나은 세상의 등장이고 역사의 진보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를 말아먹을 수도 있겠다… 싶은 요즘이다.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권력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역사의 진보를 이어나가야 되지 않을까 싶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분명히. 역사가 퇴보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역사는 전진하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4) 대련항부두와 여순감옥에서 만난 이회영선생


  3일째 대련에서 대련항 부두와 여순감옥을 방문했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 중에 우당 이회영 선생이 있다. 대련항 부두는 이회영 선생이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된 장소이다. 중국군과 연합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상해를 떠나 만주로 가려 했지만 대련항 부두에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수상경찰서에서 여순감옥으로 옮겨져 모진 고문을 받다가 돌아가셨다. 이회영 선생이 연로한 나이임에도 항일투쟁을 위해 상해에서 만주로 떠나고자 할 때, 다들 선생을 말리자 이렇게 얘기하셨다고 한다.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죽는다 해도 이 또한 행복 아닌가…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만리같은 귀중한 청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몇 번이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내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는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면목 없는 일일세.”


 


  이 이야기를 읽고 나면 나야말로 참 부끄럽고 면목 없다. 명예와 권세를 내려놓고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으면 노년에는 한숨 돌리며 살 수도 있었을텐데…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삶속에서 늘 남다른 선택을 해왔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남다른 선택이 위대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5) 마치며  
늦은 시간에 조용히 여행후기를 정리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진지한 고민의 흔적이 많이 묻어있는 것 같다. 여행의 목적이나 내용이 가볍지만은 않았지만, 여행 안에는 소소한 즐거움들이 아주 많았다.

  꽁꽁 얼어붙은 박작성을 거북이처럼 올라가고 내려왔던 것은 고생이 되도 서로 도와가며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압록강을 바라보며 먹었던 매운탕은 평생 먹어본 매운탕 중에 가장 일품이었다. 중국현지식당에서 먹은 고구마튀김??도 정말 맛있었다. 버스이동 중에 돌아가며 DJ가 되어 음악을 선곡한 것도, 또 돌아가며 준비한 자료를 발표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휴게소에 들러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과 김치를 맛있게 먹었던 것도,, 매 식사를 마치면 일회용맥심커피를 배급(ㅋ)받은 것도 생각해보면 재밌다.


  손난로랑 털모자, 목도리 등등 바리바리 챙겨 오셔서 정작 자신은 안 쓰시고 주변사람들 챙겨주시는 으뜸지기님의 배려도 참 따듯했다. 품격 있는 안내로(함께 다녀온 분들은 이 의미를 아실 듯^^) 최고의 여행을 만들어주신 여행사 사장님의 가이드도 정말 잊히지 않는다. 배우고 가는 게 참 많았다. 우리 여행에 여러모로 많은 지원을 해주시고 세심하게 신경써주신 권사장님도 정말 감사했다. 무엇보다 여행길을 동행하며 의미 있는 ‘평화여행’을 함께 만들어간 평화쌤들이 있어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