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평화여행-슬픔을 넘어 당당함으로

By |2018-12-18T14:37:04+00:0012월 6th, 2018|서울KYC 뉴스|

지속가능한 평화를 위한 기억투쟁

-서울KYC 평화길라잡이 장 혜주

제주로 도착하는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는 몰랐다. 하지만 1박2일 답사를 마치고 제주공항에서 서울 가는 비행기를 기다릴 때는 달랐다. 내가 타고 갈 육중한 비행기가 달릴 활주로, 4.3 당시 정뜨르비행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곳에는 희생자들의 유골이 뒤섞여 아직도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제주도에 놀러 오가는 동안 수 십 번의 비행기를 탔지만 그 곳에 이렇게 아픈 사연이 깔려 하루 수백 번 시조새보다 더 무거운 비행기에 끊임없이 할퀴어지고 있다는 것(김수열님의 시에서)을 부끄럽게도 처음 알았다. 역사를 왜 공부하는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4.3을 아는가. 아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저 껍데기였다. 소설가 김석범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기억의 자살’을 강요당했다. 알아도 모르는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하며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70여년 세월동안 피울음을 삼켜 온 제주도민들을 생각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비행기는 계속해서 날아오르는데, ‘4.3 70주년 제주방문의 해’라는 덤덤하고 별 인상 없는 단어 위에 ‘제주 4.3 기억투쟁’을 새겨 본다.

2018년 11월 17일 역시나 따스한 제주에서 찾은 4.3평화공원은 너무나 추웠다. 위령제단에 참배를 하고 1만 4천여 위패가 모셔져 있는 위패봉안소에 들어가 보니 말문이 막힌다. 총희생자 수는 당시 사건 전 인구수에서 사건 후 인구수를 뺀 2만 5천 가량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한 행불자 표석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제주 곳곳에 아직도 묻혀 있거나 바닷물에 던져져 영원히 찾지 못하는 원혼들이다. 위령탑을 둘러싼 각명비의 희생자 명단에는 같은 날 사망한 사람의 수가 수십, 수백 이어지고, 9세, 7세, 3세 심지어 1세 아가들도 보인다. 아직도 제대로 된 이름을 새기지 못한 백비를 마주하는 마음은 부끄럽고 무겁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제주는 해방 후 새로운 나라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뜨거웠고, 그 열망이 분단과 그로 인한 전쟁이 뻔히 보이던 남한만의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너도 나도 산에 오르게 했다. 그들 모두 독립된 나라, 통일된 나라를 위해 당당히 임했고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런 주장이 빨갱이로 덧칠되어졌다.

건국 5칙

  1. 기업가와 노동자가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2. 지주와 농민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3. 여자의 권리가 남자와 같이 되는 나라를 세우자.
  4. 청년의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를 세우자.
  5. 학생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기념관은 그 전 과정을 아주 입체적으로 재현해 놓고 있다. 1948년 11월부터 있었던 초토화 작전은 해안으로부터 5킬로미터를 제외한 모든 곳의 주민을 폭도로 규정해 무차별 학살했던 것을 불타오르는 화면으로 나타냈다. 전 희생자의 80%가 이 때 생겼다. 강요배 화백의 그림 <제주도민의 5.10>은 들여다 볼수록 너무나 따스하고 평화롭다. 그에 비해 토벌대를 피해 숨어들었다 11명 모두 몰살당했던 다랑쉬동굴은 처참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모자르다.

선흘리 동백동산의 도틀굴에 가보았다. 밖에서 보기에는 그냥 바닥이 조금 파인 것 같은데, 과연 이런 곳에서 노인과 아이를 데리고 몇 날이고 지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솔직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당시 동굴은 숨겨주고 살려주는 고마운 장소였다. 예쁘고 빨간 동백꽃이 많이 피는 이런 동산에서 피의 학살이 있었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고 믿기지도 않는다. 제주 동백꽃은 제주 4.3의 상징이 되었다. 死. 삶을 동시에 나타내는 동굴과 동백꽃.

제주 4.3을 문학으로 고발한 현기영의 소설<순이 삼촌>의 배경이자 당시 제주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북촌리의 너븐숭이 4.3 기념관으로 향했다. <순이 삼촌>은 1949년 1월 17일(음력 섣달 열 여드레날은 마을 전체가 제사를 지낸다) 무장대에 의해 군인 2명이 사망하자 토벌대가 북촌초등학교에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300여명을 집단 학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학교 옆 옴팡밭이 주인이던 순이 삼촌(제주도에서는 먼 친척 아저씨, 아주머니 모두를 삼촌이라 부른다)은 시체더미에 깔려 살아 나왔지만 자식 둘을 그 밭에서 잃은 후 한 많고 신산스러운 삶을 살다 그 밭에서 목숨을 거둔다. 기념관 건너편에 있는 애기무덤은 이 사건이 얼마나 무차별적인 학살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아기들이 빨갱이란 말인가. 애기무덤 뒤로 <순이 삼촌> 문학비가 있다. 북촌리 출신인 작가는 4.3을 알리는 것이 평생의 소명이었다고 한다. 나도 그의 작품들을 통해 4.3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한 공동체가 멜싸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말이야. 이념적인 건 문제가 아니야. 거기에 왜 붉은색을 칠하려고 해? 공동체가 무너지고, 누이가 능욕당하고, 재산이 약탈당하고,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친구가 고문당하고, 씨멸족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항쟁이란 당연한 거야.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항복하고 굴복해야 하나? 이길 수 없는 싸움도 싸우는 게 인간이란 거지” _현기영 <제주작가> 22호 73쪽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서우봉 해안의 일제 진지동굴 주변은 아름다운 노을로 물들어갔다. 처음 보는 일제동굴은 충격적이다. 일부러 찾아 들어가지 않으면 거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일본군은 엄청난 수의 제주도민을 동원, 강제노동을 시키며 해안절벽을 뚫어 동굴을 17기나 만들었다. 카미카제처럼 어뢰를 이용한 자살공격을 계획하기도 했다니 전쟁의 비정하고 참혹한 모습에 분노가 가슴을 짓누른다. 그럼에도 너무나 아름다운 제주의 밤은 아리다.

다음날 아침에 찾은 섯알오름 학살터는 제주에서도 요망하고 용맹하기로 유명한 서귀포 대정리에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전국적으로 좌익전향자나 북에 도움을 줄 것 같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보도연맹원이라 하여 체포, 구금했다. 제주에서도 820여명을 예비적으로 검속하였고, 모슬포에서는 374명이 검속되었는데, 이들 중 150명을 대정읍 상모리 절간 고구마 창고에 수감했다가 1950년 8월 20일 집단 학살하였다. 같은 날 섯알오름 자락 옛 일본군 탄약고터에서 집단학살된 132명의 시신들은 6년 여 세월이 흐른 1956년 5월 18일이 되어서야 뒤엉킨 뼈들을 대충 맞추어 집단 묘역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여 백조일손(百祖一孫, 서로 다른 132분의 조상들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키었으니 그 후손들은 모두 한 자손이다)지지라 한다. 끌려가며 죽음을 예감한 희생자들이 마을사람들이 시신을 찾을 수 있도록 고무신과 동전 등 소지품들을 떨어뜨렸던 것을 기려 위령비 앞에 놓인 검정고무신들을 보니 당시의 암담하고 절박했던 모습이 그려져 먹먹하다. 위령비 뒤의 묻힌 돌들에 이렇게 새겨 있다. 風悲日曛沒만벵디諸位鎭魂 腷臆誰訴沒西卵百祖鎭魂(바람은 슬프고 해는 어슴프레하구나 만벵디에 묻힌 여러 혼을 위로하다/ 답답한 가슴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섯알오름에 묻힌 백명의 조상혼을 위로하다)

비가 오락가락 내리고 바람이 차다. 동광리 무등이왓은 4.3 당시 토벌대에 의해 아예 사라져 버린 마을이다. 영화 ‘지슬’로 만났던 그 마을. 할머니와 함께 그 마을을 직접 가보는 대신 복지회관에서 홍춘호 할머니 말씀을 들었다. 올해 81세인 할머니는 당시 11살이었고 큰넓궤(동굴)에서 50~60일을 숨어 있었다. 먹을 것은 턱없이 부족했고 물도 동굴 천정에서 떨어지는 것이나 바닥에 엎드려 빨아먹어야 했다. 굴이 발각되었을 때 영화에서처럼 마른 고추를 태워 쫓아내고 그 후 경찰이 동굴입구를 꽉 막아 놓은 돌을 들어내고 탈출하였지만 끝내 잡혀 일부는 서귀포 정방폭포에서 집단 살해당하고 할머니는 감금되어 여러 날을 너무나 배고파 바닷가 해초 등을 따먹으며 살아남으셨다고 한다. 남동생 셋 중 둘을 동굴에서 잃고 그 후 아버지와 어머니를 차례로 잃은 할머니는 남동생을 혼자 키우며 고통 속에 말 못하고 지냈는데 십여 년 전부터 이야기 할 수 있고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안내하는 것이 좋다 하신다. 그동안 ‘창피했다’고, ‘폭도들’이라고 손가락질 당했기에 창피했지만 이제는 괜찮다 하신다. 함께 답사 간 김창섭 선생님은 말씀 듣는 내내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다. 모두 같은 심정일 터. 울먹거리며 할머니와 포옹하고 거친 손을 잡고 이리 살아 오셔서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헤어졌다. 그런 험악한 세월을 지나 오고서도 환하게 웃으며 이제 살 만하다고 하시는 강인한 생명력과 여유가 경이롭다.

바닷가 선인장마을 월령리 4.3의 피해로 후유장애인이 되신 무명천 할머니 댁에서 살아생전 할머니 모습을 만났다. 1949년 1월 나이 서른다섯에, 경찰 토벌대의 총탄에 아래턱을 잃은 채 평생을 제대로 씹지도 말하지도 못한 채 2004년 90세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원래 명랑한 성격의 할머니 모습과 씹을 수 없어 항상 소화불량에 시달려야 했고 피해의식으로 대문 앞에 나올 때도 늘 문을 잠그는 모습을 화면에서 뵈니 가슴 답답하고 화가 난다. 할머니가 30여년을 사셨던 자그마한 방에는 할머니의 한복과 침구류, 약봉지, 실패, 머리빗 등이 자리하고 있다. 할머니,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어요. 이제 편히 쉬세요. 인사를 드리자니 눈앞이 흐려진다. 돌담 아래 하얀 국화와 선인장은 여전히 예쁘다.

나목의 퐁낭(팽나무)과 떨어진 빨간 동백꽃은 아름다운 제주를 참혹했던 제주와 함께 떠올리게 한다. 모든 과정을 지켜봤을 그 나무들은 지금도 푸른 잎과 꽃을 피워내며 살아가고 있다. 70여년 세월 희생자들과 가족들도 기억의 끈을 놓지 않으려 울음을 삼키며 고통의 시간을 견뎌왔다. 4.3 당시 제주도민들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자유롭고 통일된 나라에 살고자 한 마음밖에 없었다. 이제 붉은 섬 제주는 슬프고 아프기만 한 땅이 아니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발걸음이 씩씩한, 소중하고 끈질긴 생명의 땅이다. 이제는 제대로 기억하자. 불쌍하고 비통한 학살만이 아니라 당당하고 요망한(똑똑하고 야무진) 제주를 말이다. 다크투어 내내 가득한 아픔과 애석함은 아름다운 풍경의 제주와 강인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며 감사한 보석을 만난 심정이 되었다. 떠나오는 제주공항에서 되뇌었다. ‘제주도 촘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보물이우다!’

-본 글은 오마이뉴스에서 게재되었습니다.-